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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로피 _김명자 교수 (환경리포트_1994)
작성자 MML 작성일 11-11-30 12:40 조회 7,066

엔트로피 


환경리포트 (1994년 7-8월호_통권 제 9 호) [http://www.ksdn.or.kr/resource/list/list02/ls0215/ls0215003.htm] 

김명자 (숙명여대 교수)

과학사를 살피면, 과학이 가치 중립적이란 신화는 무너지고 만다. 어느 시대가 낳은 과학이론은 과학자의 인생관, 자연관은 물론 당대의 시대 사조나 사회...경제...문화적 제반 요소들이 상당히 긴밀하게 상호작용한 총체적 산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어느 시대적 분위기가 무르익어 어떤 과학이론을 출현시키는가 하면, 그 배출된 이론이 다시 문화의 여러 영역에서 되먹임 되어 직접 또는 간접의 영향을 미친다는 얘기이다. 다윈의 진화론으로부터 사회적 다윈주의가 출현한 것은 그 가장 극적인 예이고, '엔트로피 법칙'이 현존 과학기술 문명에 깔린 발전 개념을 비판하고 새로운 세계관을 모색하는 틀이 되는 것도 그 같은 맥락이다.

21세기의 새로운 세계관, 엔트로피

[엔트로피: 21세기의 새로운 세계관(Entropy: A New World view)]은 현재 미국 생물과학기술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의 저술인데, 리프킨은 92년에 죠지 워싱턴 대학의 시험관 수정프로그램의 배자복제시험 성공 소식이 매스컴에 발표됐을 때에도 즉각적으로 윤리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던 문명 비평가이다. 그의 저서로는 [엔트로피] 이외에 유전공학기술의 사회적 충격을 비판한 [Who Should Play God?], [The Emerging Order], [The North Will Rise Again], [Commonsense II] 등이 있다. 펜실바니아 대학의 와튼 스쿨과 터프츠대학의 플레처 스쿨을 거친 리프킨의 경력으로는 의회 위원회에서의 경제 및 사회문제에 관한 노사관계 고문, 80년 카터 행정부에서의 80년대 경제발전 계획의 입안 등이 눈에 띤다.

리프킨은 [엔트로피]에서 서양 세계관의 흐름을 역사적으로 개관하면서 현대 산업사회의 만성적 위기를 해결하고 주어진 한계 내에서 살아가는 지탱가능한 발전의 새로운 세계관으로써 엔트로피 법칙의 진리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제시한다. [엔트로피]는 '세계관', '엔트로피 법칙', '엔트로피 - 새로운 역사의 틀',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와 다가오는 엔트로피 분수령', '엔트로피와 산업시대', '엔트로피 - 새로운 세계관'으로 짜여 있다. 그의 논의는 역사상의 기술혁신에 의해 인류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잃은 것은 무엇인가, 선진 산업사회의 모순은 무엇인가 등에 초점을 맞추어 경제...에너지...제도...가치관...과학...교육...종교...군사 등의 세분된 분야에서 구체적 데이타를 실감 있게 제시한다. 그로써 그의 생태주의적 분석은 물질지상주의에 혼을 팔아버린 우리 모두에게 섬찟한 충격마저 던진다.
 
그가 엔트로피 법칙을 문명비판의 시각에 도입하고 있는 배경에 관해 그의 말을 한 구절 인용해 보자. "세상은 갈수록 혼돈의 와중으로 빠져들고 있다. 어떤 일도 제대로 되어가는 게 없어서 여기저기서 끝없는 수선과 짜깁기의 연속이다.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사건이 터진다 - 거기에 관련된 사람들 모두를 몰아 붙여 탓해 보아도 사태는 갈수록 악화되기만 한다 - 정치권의 리더나 누구 대단한 사상가라 할 지라도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된 문제를 풀 수 있으리라는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 붕괴로 몰고 가는 냉혹한 기운이 세계를 잠식하는 오늘의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현존하는 세계관에 대해 냉철하게 따져 보아야 한다. 세상을 병들게 하고 그 속의 모든 것을 오염시키는 주범은 바로 우리들의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황 또한 1960년대 이후의 급진적 발전에서 앞뒤 가릴 것 없이 선진국의 발전 모델을 졸속으로 수용하다 보니 미처 대처하지 못한 허다한 부작용에 맞닥뜨리고 있어, 엔트로피 이론에 근거한 이 '세상'과 '발전'이란 개념에 대한 발상의 대전환이 깊은 호소력을 지니며 가슴에 와 닿는다. 그렇다면 엔트로피 법칙이란 무엇이며, 자원의 고갈과 오염의 심화라는 환경문제를 비롯한 현대문명의 중증을 향한 비판적 시각에는 어떻게 적용되는 것일까?

자연세계의 변화 방향성을 규정한 엔트로피 법칙

불의 발명 이래 인류의 불에 대한 관심은 지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19세기 들어서야 열에 대한 연구는 그 기틀이 잡혀, 그 결과 에너지가 물리학의 기초개념으로 자리한다. 그러한 배경에서, 1865년 클라우지우스(Rudolf Clausius, 1822-88)는 '열의 역학적 이론에 관한 두 가지 기본법칙'으로서, "(1) 우주의 에너지는 일정하다 (2) 우주의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라는 법칙을 내어 놓게 된다. 이 선언은 열역학의 제1, 제2 법칙의 탄생이자 물리학 성립의 공포를 의미했다.

엔트로피 법칙은 자연세계의 변화의 방향성을 규정한 것이었다. 사실상 엔트로피 법칙이 말하고 있는 줄거리는 이미 태고적부터 누구나 알고 있던 평범한 진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죽은 사람이 무덤에서 걸어 나와 어린아이로 되돌아가는 일은 없고, 폭포에서 떨어진 물이 저절로 거꾸로 솟아 올라가는 일은 없다. 그리고 한 번 타버린 술의 잿가루로부터 저절로 다시 새 술이 만들어지는 일은 없다는 정도의 너무도 당연한 진리를 단지 법칙으로 서술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클라우지우스에 의해 창안된 엔트로피(Entropy, S)는 단적으로 어느 계의 무질서한 정도를 나타내는 물리적 개념이라고 정의된다. 그는 '열의 역학적 이론에 관하여(On The Mechanical Theory of Heat)'란 논문에서 모든 언어에 두루 쓰이도록 그리스어의 '변형(tropy)'이라는 단어를 빌어 'energy'라는 용어에 유비적으로 'entropy'라 명명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는 뻔한 진리에 관한 내용을 담은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법칙의 지위로 정의된 엔트로피는 그 의미가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개념이 결코 아니었다. 실제로 엔트로피 개념의 정의는 클라우지우스에게도 15년이 걸린 난해한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1877년 볼츠만(Ludwig Boltzmann, 1844-1906)에 의해 S = klog W (W는 분자들의 배열 방법 수)라는 수학적인 관계식이 유도되면서야 비로소 엔트로피의 물리적 의미가 설정되었고, 엔트로피는 과학사상 전문 과학자들에게서도 가장 많은 오해를 유발시켰던 기록을 남겼다.

자연세계의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인공적 변화

엔트로피 법칙은 그 출현과 함께 우주론과 연결되었다. 우주의 물체가 식어가서 끝내는 생물이 살 수 없는 냉각의 종말에 이를 것이라는 비관적 우주론은 18세기로 거슬러 오르나, 19세기 중반에 다시 엔트로피 개념의 명료화에 기여했던 과학자들, 예컨대 톰슨(William Thomson), 헬름홀쯔(Hermann von Helmholtz), 클라우지우스 등 당대의 석학들은 우주 종말의 비관론에 휩싸여 우울해 했다. 클라우지우스는 엔트로피 법칙의 우주론적 결과로서 열죽음(heat death)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즉 우주는 결국 최대 엔트로피 상태에 이르러 사용가능한 에너지가 완전히 사용불가능한 형태로 바뀌게 될 것이고, 따라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영원한 정지상태에서 이 세상은 시간이란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종말에 이를 것이라 보았던 것이다.

1877년 볼츠만에 의해 증명됐듯이, 엔트로피 법칙은 확률적 법칙이다. '맥스웰의 도깨비'를 등장시킨 사고실험에서 추론됐던 것처럼, 이 법칙에 위배되는 과정이 일어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가능성이란 '한 떼의 원숭이들이 타자기 위로 멋대로 돌아다닐 때 영국 박물관에 소장된 모든 책을 찍어낼 수 있는' 가능성보다 못한 것이다. 슈뢰딩거가 생명현상에 도입한 네겐트로피 즉 옴의 엔트로피 개념은 부분계에 국한되는 것일 뿐, 어떤 이론이나 기술에 의해서도 계 전체의 엔트로피를 감소시킬 수 있는 길은 없다.

엔트로피 법칙은 우주의 어느 곳에 질서가 더 생기는 것은 다른 곳에 그보다 더 큰 무질서가 생긴다는 것을 절대진리로 천명한다. 기계론적 세계관(mechanical philosophy)에서 이른바 발전에 의해 '더 질서 있는' 물질적 환경을 만든다는 것은 동시에 다른 한 편에 그보다 더 큰 무질서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자연세계에서의 인공적 변화란 사용가능한 에너지를 불가능한 형태로 바꾸면서 주위의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방향, 즉 값어치가 있는 상태에서 값어치가 없는 상태로의 한 방향으로 밖에는 일어날 수가 없다는 한계를 깨우쳐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 지구가 경쟁적으로 벌이는 경제성장이란 결국 사용가능한 자원을 사용불가능한 쓰레기로 바꾸면서 그렇게 하지 않아도 저절로 늘어날 수 밖에 없는 엔트로피의 증가를 가속적으로 높임으로써 끝장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는 형상이 되고 만다.

저(低) 엔트로피 사회가 자원의 낭비와 오염을 줄일 수 있다

인류의 역사는 우리에게 어느 문명의 에너지 사용은 그것으로부터 발생되는 엔트로피를 배출시킬 수 있는 적절한 장치가 작동되고 있는 한에서 지속되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20조 달러를 웃도는 화석연료 의존의 세계 경제가 가차 없이 쏟아내는 오염물질은 실로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더 이상의 시행착오를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갖가지 국제환경협약의 발동은 구체적으로 산업활동에 족쇄를 채우기 시작했다. 산업후 사회로의 문명의 또 하나의 분수령에 서서 이제 인류 사회가 문명의 존속을 원한다면 새로운 에너지 환경에 적응키 위한 새로운 에너지 기술과 사회적 인프라로 옮겨가지 않으면 안될 상황인 것이다.

문명이 야기시키는 쓰레기를 처리하는 데에는 자연적인 메커니즘을 이용하는 것이 최상의 지속적 방법으로 밝혀져 있다. 그러므로, 인위적인 변화는 자연의 일부로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귀결점에 이르게 되고, 이런 맥락에서 엔트로피 법칙은 동양의 전통적인 과학사상과 만나게 된다. 엔트로피 개념이 제시하는 지속가능한 발전의 세계관은 과도한 물질주의를 철저히 배격한다. 우리 주변의 세상사가 무언가 크게 잘못돼 가고 있다는 느낌은 구태여 어느 특정인의 것이 아닌 상황인지라, '어찌 됐든 물질적 진보를 추구한다'든가 '클수록 좋다'는 식의 高엔트로피 개념이 헛되고 덧 없는 것임을 탄식하는 소리는 신음처럼 퍼져가고 있다.

에너지 전환의 분수령에 서서 低엔트로피 사회야말로 자원의 낭비와 오염을 줄일 수 있는 대안이라는 인식은 상당히 퍼져가고 있으며, 이제 행동으로 옮겨져야 할 절실한 필요성에 직면하고 있다. 이 책은 그러한 발상의 전환을 데이터에 바탕하여 강한 호소력으로 설득하는 일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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