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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담론의 지형, 무엇이 문제인가?_국가가 전유한 핵심기표 ‘녹색’ (교수신문_2010 5 24)
작성자 이규호 작성일 11-11-30 12:43 조회 6,626
국가가 專有한 핵심기표 ‘녹색’ … 권위있는 담론 형성 멀다
 
엄은희 (iCOOP생협연구소 연구원)_교수신문 (2010.5. 24)
   
2005년 1월 故 문순홍 박사가 남긴 대표작 『생태학의 담론』(1999, 솔)의 부제는 ‘담론의 생태학’이다. 제목과 부제가 상호대구를 이룬다. 1970년대 초 서구사회에서 생태논의의 주창자들은 소위 ‘생태학의 시대’를 선언하며 호기롭게 생태 패러다임론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들은 패러다임 전환에 준하는 인식지평 변화의 비등점에는 이르지 못했고, 1970년대 말부터 다양한 이념적, 개념적 진화 경로를 따라 다양한 생태담론들로 분화돼 현재에 이르렀다. 이러한 변화는 생태 논의가 정교해지고 풍성해지는 것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혼돈과 복잡성이 더해지는 과정이었기에 이 책의 부제가 ‘담론의 생태학’인 것이다.
 
최근 진보학계 일각에서 적-녹-보의 연계와 연대를 지향하자는 주장이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얼만큼의 연대가 실천되고 있는지 묻는다면 답은 그다지 신통치 못하다. 그 이유는 적과 녹과 보라 사이의 거리만큼 적, 보라, 특히 녹 내부에 존재하는 차이와 거리도 만만찮기 때문이다. 녹색 담론 내부에는 여름의 신록만큼 짙은 녹색 (예: 근본생태론)에서 그 보다 엷은 녹색 (예: 생태적 근대화론)을 거쳐 녹을 방법론 정도로 삼는 사녹색 (예: 녹색경영이나 환경시장주의)에 이르는 스펙트럼이 펼쳐져 있다. 그 곁에는 적색과 가까운 생태사회주의 혹은 생태마르크스주의 같은 녹색도 있고 보라와의 친화력을 강조한 생태여성주의도 존재한다. 반면 전혀 녹색이 아닌 것에 분칠해가며 녹색이라 우기는 주장도 눈에 띈다.
 
사실 이러한 녹색분칠(greenwash) 행위까지 생태담론의 언저리에 발을 걸칠 수 있는 것은 본래 생태담론이 좌파와 우파, 보수와 진보의 경계에 관계없이 사용가능한 개념틀이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다양한 종 가운데 인류는 부인할 수 없는 優點種으로 유한한 자원과 다른 種들에 대한 착취가 다양한 환경문제의 원인임은 부인할 수 없는 조건이다. 이에 대해 사회생태주의자들은 자유롭고 정의로운 공동체 건설을 통해 자연과의 조화를 회복하자고 주장하지만, 보수적 생태주의자들은 계몽되지 못한 제3세계 대중들의 무분별한 인구증가를 환경악화의 원인으로 지목하며 이들에 대한 인위적 지원이야말로 생태적으로 올바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생태담론의 지형이 중층적이고 복잡해지다보니 생태담론을 지도화하는 것도 어려운 과제다. 마르크스주의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출발하는 생태사회주의 혹은 생태마르크스주의 류의 주장만 해도 그렇다. 여러 차례 되풀이 되는 독해와 공동학습의 과정을 거쳐 겨우 논쟁지점을 찾고 보니 이제는 생태마르크스주의 내부의 분화도 만만찮다. 논쟁의 지점은 확인됐지만 그 논쟁과 차별성의 쟁취가 어떤 사회적 의의를 갖는지 회의가 일기도 했다. 신진대사균열론은 자본주의 사회의 생태문제를 분석할 수 있는 원리를 제공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자본주의 일반 모순의 해결 그 이상의 답을 내놓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정치사회학 넘나드는 특성
 
더 나아가 자연과학과 정치사회학을 넘나드는 생태담론의 특성도 생태담론 공부의 어려움을 배가시킨다. 과학으로서의 생태학과 사상으로서의 생태주의는 같은 ecology로 표기된다. 그래서 생태담론에서는 과학으로서의 생태학의 개념들이 자주 활용되고, 복잡한 자연과학의 개념들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러한 생태담론을 따라잡기란 쉽지 않다. 전지구적으로 가장 논의가 활성화된 기후변화가 그렇다. 입장을 정리하고 정치적 판단을 하려면 기후변화에 대한 과학적 지식과 해결책들의 다양한 기술적 조처들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는 선행돼야 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기후변화 과학에 대해 세부적 이해를 어느 순간 포기해버렸고, 기후변화는 인류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큰 위기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현실에서는 이에 대해 이해하지도 대처하지도 못하는 불가항력의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각각의 생태담론들은 여전히 부분적 진실을 반영하며 부분적 설명력과 설득력을 지닐 뿐 아직까지 절대적 지지를 선언할만한 권위 있는 담론을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 많은 생태담론들이 상호 논쟁 속에서 현실의 잠재적 실재나 사물의 질서를 더 많이 포획하며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나 국가가 생태담론의 핵심 기표를 전유하도록 속수무책당하고 있는 형국이다. 지속가능발전이란 용어가 대표적이다. 강한 지속가능성과 약한 지속가능성을 구별하고 논쟁 속에서 정의와 형평성을 강조하는 강한 지속가능성을 발전시키지 못한 채 이 용어는 성장주의자 혹은 개발주의자들의 전유물이 돼버렸었는데, 그마저도 정권교체 이후에는 녹색성장에 자리를 빼앗겨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생태비평은 이원적일 필요가 있다’는 문순홍의 말을 다시금 되새길 필요가 있겠다.
 
재전유의 가능성과 담론들간의 대화
 
한편에서는 생태담론은 생태주의가 아닌 것들과 동일한 언어를 구사해야 한다. 이는 소통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작업이며 이 과정에서 포기했던 기표들의 개념적 층위나 담론적 위치를 바꾸는 재전유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개념이나 언어를 개발하고 이를 생태담론의 틀로 적극적으로 포섭하려는 노력도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생태담론들 ‘간’의 대화도 중요하다. 각각의 생태담론이 가진 한계가 또 다른 생태담론을 통해 설명되곤 하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복잡하고 중층적인 생태담론의 장에서 부유하는 개별화된 관념들로 남을 수는 없다. 생태적 사고의 단초들이 잎사귀에서 가지로, 가지에서 원줄기로, 원줄기에서 뿌리로 연결되며 생태주의라는 큰 나무에서 키워나가는 것은 이제 생태주의자 공통의 과제가 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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