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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이후의 철학, 어디로 갈 것인가_과학기술 비판에서 과학기술윤리로 (교수신문_2011 12 21)
작성자 이규호 작성일 12-01-09 17:35 조회 7,162
침묵 이후의 철학, 어디로 갈 것인가 - 과학기술 비판에서 과학기술윤리로 
 
송상용 (한림대 명예교수)_교수신문 (2011년 12월 21일) 
 
"과학은 지식을 늘리는 데 커다란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지혜 없는 새 지식은 인류에게 혜택뿐 아니라 고통과 죽음을 가져올 수도 있다. 전쟁, 죽음의 수용소, 독재, 빈곤, 환경파괴를 피하려면 지혜를 얻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과학철학의 갈 길은 명백하다." 
                                                     
 “인간 활동의 어떤 분야도 지적으로나 기술혁신에서 과학기술만큼 성취한 적이 없다. 그러나 이 도전 받지 않는 진전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이 반드시 인류의 도덕적ㆍ사회적 진보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이성의 꿈들은 악몽을 뜻할 수도 있다.”  캉길렘 (G. Canguilhem)에게 철학을 배우고 과학기술정책학자가 된 살로몽 (J.J. Salomon)은 20세기가 저물어 갈 때 이렇게 말했다. 20세기는 플랑크의 양자가설과 함께 시작했다. 이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나왔다. 1927년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원리를 발표하고 1929년 디랙이 양전자의 존재를 예언할 때까지 30년은 오펜하이머가 말한 대로 ‘영웅의 시대’였다. 과학은 순풍에 돛 단 듯 전진했고 인류에게 무한한 혜택을 가져온다고 믿어졌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른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순식간에 15만의 죄 없는 목숨을 앗아갔다. 라비츠가 ‘대학과학’ (academic science)이라 부른 순수과학의 전성기는 원자폭탄과 함께 끝났다.
 
핵폭탄 이전에도 과학이 빗나간 보기는 많다. 우생학 (eugenics)은 ‘좋은 탄생’ 이라는 그 어원에도 불구하고 더러운 학문이 됐다. 20세기 초 우생학운동의 전개는 과학의 대표적인 악용 사례들로 기록됐다. 미국의 국적별 이민할당법은 비앵글로색슨에 대한 명백한 차별이었다. 1930년대 유럽과 미국의 거세법은 무서운 인권 유린이었다. 나치 독일은 1934~ 39년에 사회부적응자와 정신박약자 40만명을 거세했다. 같은 때 나치와 일본 관동군 731부대의 잔인한 인간 생체실험 만행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원자폭탄과 함께 끝난 '순수과학'의 전성기
 
1930년대에 과학의 윤리를 대변한 세 가지 견해가 나왔다. 물리화학자이자 철학자인 폴라니는 자유롭고 헌신적인 사람들의 사회가 보장하는 과학 연구의 개인적 경험을 강조했고, 포퍼는 과학을 비판의 원리와 실천을 통해 실현되는 지적 정직성으로 보았으며, 사회학자 머튼은 과학의 윤리에서 문명화된 인간행동의 최고 기준이 실현된다고 보았다. 폴라니는 관료적 방향과 통제, 포퍼는 비판의 거부에 잠재된 비정직성, 머튼은 협동적인 과학적 노력의 규범과 사회 및 국가의 규범 사이의 본질적 갈등에서 각각 과학에 대한 위협을 보았다. 이들에게 과학자 사회는 윤리적으로 사회의 모형 같았다. 이 같은 과학의 이미지는 과학주의를 반영하는 것으로, 그들은 한결같이 과학을 신뢰하고 과학의 순수성을 강조했다. 한편 물리학자 버날(J.D.Bernal)은 과학의 외적ㆍ사회적 기능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과학이 의식적, 계획적으로 인류의 이익을 위해 봉사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대조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순수과학의 개념에 회의적이었으나 과학이 미래의 모르는 가능성에 대한 희망이라고 한 점에서 과학에 철저한 신뢰를 보냈다. 이들의 긍정적인 과학관은 1960년대 이후 도전을 받을 때까지 서유럽 학계를 지배했다.
 
미나마타병, 토리 캐니언호 사건 같은 환경재난을 겪은 1960년대부터 과학의 이미지는 급격하게 나빠졌다. 유럽, 미국, 일본 등 선진 산업사회를 휩쓴 반문화 (counter culture) 운동의 표적은 과학이었다. 이제 과학에 대한 공격은 과학자 사회 밖은 물론 안으로부터도 나왔다. 반과학 운동은 고도기술뿐 아니라 그것을 나은 과학 자체에도 겨누어졌다. 과학정책의 목표와 결과에 대한 도전은 과학의 내적 규범, 심지어 그 인식론적 지위마저 의심하는 데까지 왔다. 혁명적 과학철학은 주류는 아니지만 과학철학 안에서 무시할 수 없는 위치를 확보했다. 사회학에서는 과학지식사회학이 STS 운동으로 나타났다. STS 운동에는 과학사ㆍ과학철학 (history and philosophy of science, HPS)  쪽에서도 사회적 과학사와 응용과학철학이 참여하고 있다.
 
1970년대에 거세게 일어난 환경운동은 원자력발전 시비로 발전했다. 생태위기는 그 뿌리와 해결책을 둘러싸고 다양한 환경철학을 낳았다. 생태케인즈주의, 심층생태주의, 사회생태주의, 생태마르크스주의 등이 어우러져 싸웠고 이 논쟁은 1980년대 한국에서도 이어졌다. 1980년대 후반에는 정보통신공학의 약진이 디지털 혁명을 가져왔다. 온 세계가 인터넷으로 연결된 것은 사회주의의 붕괴보다 더 큰 사건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그러나 1990년대 생명공학의 놀라운 성공은 이 모든 것을 압도하고 말았다.
 
배아복제 논쟁은 오늘날 연구윤리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연구윤리는 2차대전 이후 나치 전범재판에 따라 만들어진 뉘른베르크 강령 (1947), 세계의학협회의 헬싱키 선언 (1964)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긴 전사가 있다.  1970년대 초 과학자들은 재조합 DNA 연구의 잠재적 위험을 깨달았고 1975년 애실로마 (Asilomar) 회의에서 연구유예를 둘러싸고 격론을 벌인 끝에 미국 국립보건원의 재조합 DNA 연구지침이 나오게 됐다. 이것은 연구윤리가 관심을 끌게 된 중요한 전기를 이루었다.
 
1997년 돌리의 탄생은 한국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해만 해도 이 문제를 논의한 모임이 10여 차례 열렸다. 이듬해 철학자ㆍ의학자ㆍ법학자ㆍ과학자들이 모여 한국생명윤리학회를 만든 것도 그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1986년 한국철학회가 ‘의학과 철학의 대화’라는 주제로 모임을 가진 이래 침묵을 지켜 왔던 철학계도 연달아 생명윤리를 다루는 모임을 열었다. 한국생명윤리학회는 '인간복제에 반대하는 1999년 선언'을 채택했고 한국철학회도 몇 달 뒤 비슷한 내용의 선언을 발표했다. 한국철학계에서는 개체복제, 배아복제에 대해 활발한 논의가 있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에는 생명공학 개발열풍이 불었고 생명윤리법이 4년 걸려 기형으로 태어난 직후 황우석의 줄기세포 확립이 발표돼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빠졌다. 정부, 정치권, 기업, 언론, 과학계가 황우석을 영웅으로 띄웠을 때 한국생명윤리학회와 일부 시민단체들은 항거했으나 대다수의 철학자들은 침묵했다. 2005년 말이 돼서야 황우석의 연구는 날조된 것으로 판명됐지만 황우석 사건은 엄정하게 마무리되지 않았다. 한동안 정부 주도로 연구윤리 보급이 추진됐을 뿐 '과학기술인 윤리강령'은 철학자들의 참여 없이 졸속으로 만들어졌다. 
 
'과학기술과 사회'라는 주제에 관해 선구적 몫을 해 온 유네스코는 1993년 국제생명윤리위원회 (IBC)를 만들어 생명윤리 보편선언 등 세가지 선언을 발표했다. 1998년에는 세계과학기술윤리위원회 (COMEST) 가 발족해 외계윤리, 담수윤리, 정보윤리, 환경윤리, 나노윤리 등을 다뤘으나 과학자 윤리강령은 진전이 없었다. 세계과학자윤리위원회는 지금 기후변화윤리에 전력투구하고 있다. 1999년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세계과학회의(WCS)는 과학기술윤리의 중요성이 강조된 역사적인 계기였다. 이 회의는 처음으로 과학자들이 내놓은 뼈아픈 자기비판이란 점에서 의의가 깊다.
 
생명공학 다음으로 떠오른 나노기술은 21세기의 혁명적 기술로 각광을 받고 있으나 그 성과에 대해 과장이 많고 잠재적 위험에 대한 우려도 높다. 이에 대해서는 일찍이 환경단체 그린피스가 비판적인 보고서를 낸 바도 있다. 우리나라는 나노기술 분야의 논문과 특허 수에서 세계 3위를 차지하고 있으니 나노윤리(nanoethics) 연구도 시급하다. 한국과학기술평가기획원은 2003년부터 융합나노기술과 나노소재기술에 대한 기술영향 평가를 했다. 여기에는 인문ㆍ사회과학자들이 참여했고 시민들의 의견도 참고했다. 2007년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은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와 더불어 나노윤리 국제심포지엄을 열었다. 같은 해 유네스코 아태지역사무소는 방콕에서 에너지기술윤리 국제회의를 주관했는데 두 번째 회의는 2008년 세계철학대회의 일부로 서울에서 열렸다.
 
과학과 윤리의 새로운 결합
 
2008년에는 로봇윤리헌장 제정위원회와 제어로봇시스템학회가 주관하고 지식경제부가 후원한 지능형 로봇윤리 워크숍이 열려 주목을 끌었다. 한국은 로봇분야에서도 미국, 일본과 함께 선두 주자에 속한다. 로봇윤리라는 말은 2004년 처음 나왔다고 한다. 한국은 이듬해 로봇산업정책포럼에서 로봇윤리 작업반을 만들었고 1년 만에 로봇윤리헌장 초안을 기초했다. 로봇윤리를 기술자들이 손수 만들었고 인문학자들의 도움을 청했을 뿐 아니라 이런 작업을 정부가 지원한 것은 뜻이 깊다. 로봇은 단순한 기계인가, 새로운 종인가. 로봇윤리는 로봇 자체의 윤리인가, 로봇 사용자의 윤리인가. 로봇을 윤리적 특성을 지닌 존재로 본다면 로봇윤리의 영역은 크게 확대된다. 로봇은 인간의 도구이며 생명체가 아닌 존재인데도 많은 복잡한 윤리적 문제가 있다. 로봇윤리와도 관계가 깊지만, 뇌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국내외에서 활기를 띠고 있는 뇌윤리 (신경윤리) 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20세기 초 과학이 윤리와 결별한 이래 오랫동안 과학은 윤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믿어져 왔다.  20세기말 윤리는 과학의 중심으로 돌아왔건만 한국의 과학자들은 과학은 진리를 탐구하면 되고 윤리는 상관없는 것이라는 그릇된 확신에 빠져 있다. 일반국민은 과학만능을 부추기는 언론에 세뇌돼 문제의 진상을 모르고 있다. 과학기술윤리 교육을 강화해 과학자들과 일반국민이 과학을 균형있게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철학은 첨단기술의 문제들에 관심을 보여야 하며 그 연구성과를 대중화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런던대학 명예 부교수로 있는 과학철학자 맥스웰 (N.Maxwell)은 1984년 『지식에서 지혜로(From Knowledge to Wisdom)』란 책을 냈다. 부제는 ‘과학의 목표와 방법의 혁명 (A Revolution in the Aims and Method of Science)’이다. 그는 철학이 지식을 얻는 데 그치지 말고 지혜를 찾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학계의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믿은 그는 다섯 권의 책을 더 썼고 2003년 ‘지혜의 벗들 (Friends of Wisdom)’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과학은 지식을 늘리는 데 커다란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지혜 없는 새 지식은 인류에게 혜택뿐 아니라 고통과 죽음을 가져올 수도 있다. 전쟁, 죽음의 수용소, 독재, 빈곤, 환경파괴를 피하려면 지혜를 얻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과학철학의 갈 길은 명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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