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자본주의의 종말, 그리고 속수무책의 대학
최익현 기자 [교수신문 2016 11 10]
현재 한국사회는 놀라운 가속도로 국민국가 (nation-state)의 모든 '공적 영역'이 '사적 기업'으로 둔갑하는 과정을 거쳐 가고 있다. 요컨대, 시장과 경쟁과 돈벌이에 최적화된 시스템만 살아남을 것이며 그렇지 못한 것들은 도려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기이할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파멸적인 효과를 가져다 줄 사고방식 내지는 규칙이 국가시스템의 전 분야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 영리를 추구하는 사적기업의 활동은 물론이고 농림수산업 등 자연의 생산력을 영속적으로 유지하고 관리하기 위한 활동, 의료 등 국민건강의 유지를 위한 활동, 교육 등 다음 세대의 시민적 문명적 성숙을 이끌어야 하는 활동에도 예외 없이 이 사고방식이 적용돼 시장효율성만이 유일무이한 판단의 잣대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정치가들은 (그리고 대학 총장들도) 주식회사의 최고경영자를 자신의 롤모델로 삼으며, 국민도 이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국가를 주식회사처럼 경영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명백한 사실을 왕왕 잊고 산다. 우리가 조금만 ‘생각’이라고 하는 활동을 해보면 정치에는 비즈니스의 시장에 상응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곧바로 끌어낼 수 있을텐데 말이다.
정치에 시장 같은 것이 없다면, 교육영역에서도 시장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교육은 당면한 시장을 염두에 두고서 이뤄지는 초단기 비즈니스 활동과 같은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미래를 담당할 다음 세대를 문명의 견지에서, 역사의식의 견지에서, 공동체의 견지에서, 그리고 가능하다면 시장효율성 따위는 완전히 배제하고서 제대로 키우는 장기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특히 대학교육은 현실세계를 비판하고 다른 세계를 궁리할 수 있게 해주는 일정한 거리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의 대학은 현실권력과 자본주의의 바깥에서는 그 모습을 아예 볼 수가 없게 됐는데, 이는 대학의 정신적 거리가 사라졌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한때, 그러니까 1960년대에 현실사회와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비판의 생산기지로 맹활약하던 대학이 20여년이 지난 후에 자본과 이익의 생산기지로 둔갑할 것을 강요받는 형태로 복수를 당하기 시작했고 이 복수극은 21세기에 들어와 거의 마무리된 듯하다.
경쟁원리와 시장효율성의 법칙이 곳곳에 침투하게 되면, 모든 실패는 경쟁의 아픈, 그러나 당연한 산물로 이해되고, 모든 문제는 경쟁으로 푸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팽배하게 된다. 경쟁이라고 하는 게임의 법칙을 내면화하면 경쟁에서 낙오한 사람들마저 그 게임법칙과 게임의 결과를 동의 속에서 체념적으로 받아들일 것이고, 자발적인 심정으로 패배자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서구 근대사회의 핵심개념은 자유였으나, 원래의 뜻이 변질했다.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라고 하는 자본주의의 여러 형태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자유무역 (free trade)을 연상시키는 개념이 돼버린 것이다. 오늘날 경쟁은 자유에 버금가는 중요성을 갖게 됐으며, 또 이 두 용어는 서로를 불러내주는 사이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자유의 의미는 자유롭게 경쟁하는 것이고, 경쟁은 자유의 조건이 된다. 놀랍게도 경쟁력은 이러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자격 또는 자세로까지 여겨지고 있다.
국가공동체보다 기업의 영리활동이 우선하는 자본주의체제에서 대학은 기업의 모습을 띠게 되고 시장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이유를 찾도록 요구받는다. 한국의 대학들은 산업과 협력해 시장성을 확보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는 바, 현재 인문학에서마저 산학협력이라는 용어가 낮선 용어가 아니다. 시장성과 생산성이 뒤떨어지는 학과나 대학은 다양한 제재, 심지어는 퇴출마저 감수해야 한다. 이렇게 대학이 사적기업화가 됐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1) 하나는 끝없는 생산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고, (2) 다른 하나는 생산과정을 사기업의 방식대로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수들은 지식상품을 생산하고 교육을 책임지도록 요구받으면서 그 과정 또한 철저하게 검증받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업적평가라고 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교육과 배움의 과정이 인격과 깨달음의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기술적 차원에서 양적으로 관리되는 지표항목이 된다.
교수는 강의시간에 왜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며 또 어떤 결과를 기대하는지를 미리 밝혀야 하고, 대학은 그 과정과 결과를 분석해 교수들을 평가한다. 대학기업의 입장에서 교수는 생산관리직 노동자이고 학생은 교육소비자다. 소비자만족을 위해 대학교육의 전체 과정이 품질관리대상이 되는 것이다. 대학의 주체는 더 이상 교수와 학생이 아니고 그들 사이에 지적인 교류가 있는 것도 아니다. 기업식 행정관리체제가 피고용인인 교수와 상품화된 지식과 소비자인 학생의 삼자를 연결해 대학이라고 하는 것을 구성하고 있다. 공동체로서의 대학은 이제 까마득한 과거의 것이 돼버렸다. 이러한 이념이 케케묵은 것으로 폐기처분, 용도폐기된 지는 오래됐다. 이제 대학은 살아남으려면 생산성에 대한 철저한 평가를 받고 효율성검사를 통과해야 한다. 오늘날의 대학은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적 지식활동기지였던 과거의 모습에서 벗어나 자본주의체제를 충직하게 주인으로 섬기는 교육상품생산기지로의 변신을 완료했다.
대한민국 교육부가 대학에 강요하는 정책은 전적으로 취업률지상주의, 기업연계지원정책, 공학과의 융합교육 강제 따위의 큰 줄기에 입각해 있다. 이 정책의 문제점을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1) 교육부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취업률은 대학에 강요할 것이 아니라 정치가 정리를 잘 해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면 그것으로 해결될 일이다. 새로운 일자리창출은 정부와 기업이 해야 할 일이지 대학이 책임질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2) 정책당국은 취업률이 실제로는 오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대학에 취업률과 시장효율성의 평가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그들은 현재 기업들이 새로운 일자리를 내놓지 않는, 혹은 내놓지 못하는 근본이유가 딴 데 있다는 사실에 대해 애써 눈감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나지 않는 것은 개개 기업들이 잘못된 기업윤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체제 자체가 경제성장이 가능 혹은 유지되던 단계를 이미 지나 위축, 소멸, 종말의 단계에 진입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자본주의체제가 겪고 있는 위기는 경제성장이 이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고, 이는 곧 자본주의체제를 떠받치고 있는 기본원리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자본주의체제가 치유불가능한 근본적 위기, 곧 종말에 가까이 다가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체제가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는 현재, 대학은 이에 대한 어떠한 전망도 제시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자본주의 특유의 질환을 앓고 있다. 삶과 역사, 사회와 개인에 대한 비판과 성찰에 매진해야 할 인문학과 사회과학과 문화예술은 쓸모없는 학문으로, 경제적 천덕꾸러기로 천대를 받으며 급속도로 대학에서 사라지고 있다.
이에 정확하게 반비례해 인류사회의 가치와 전망보다는 목전의 사적 이익에 목매다는 왜곡된 의미의 실용학문이 각광과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앞의 학문들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아가고 있다. 그러나 장담컨대 얼마 가지 않아 공학마저 공급과잉에 내몰려 정원축소나 폐과 같은 현재 인문학이나 예술계열학과가 당하고 있는 그 운명을 답습하게 될 것이다. 현재의 풍요는 곧 불어 닥칠 죽음이나 빈곤의 전주곡인 것이다. 결국, 한국사회는 그 어떤 국가들보다 앞서서 대학이후 (post-university)의 시대, 야만적인, 너무나 야만적인 시대를 실현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