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기술 (교수신문 2014년 07월 28일)
추천릴레이 에세이 - 최해연 박사
대학시절 어느날 에리히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을 집어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 연예의 기술을 한 수 배울까 하는 기대도 한편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첫 페이지에 펼쳐진 내용은 지금 그 유려한 표현은 잊었지만, 오랜 시간 마음에 각인됐다. 내용은 이러하다.
사람들에게 사랑처럼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 사랑을 받고 또 사랑을 주고, 사랑이 가득한 삶처럼 인간이 갈망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도 사랑처럼 잘 하기 위해 관심을 기울이고 어떻게 해야 할 지 배우려 노력하지 않는 것도 없다고 했다. 사람들은 어느날 갑자기 짝이 나타나면 사랑에 빠지고 그 후로 행복하게 살았다는 옛날이야기의 한 구절을 사실처럼 믿는다. 그렇지만 낯선 사람을 친밀하게 묶어준 호르몬의 힘이 약해져서 눈에 씌워졌던 콩깍지가 떨어지고 나면 상대에 대한 실망과 적대감을 직면하게 된다. 상대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에 괴로워하며 어쩔 줄 몰라 한다. 사랑이 커지는 만큼 혼자만의 기대도 커지고 자신의 기대와 현실이 다름에, 상대가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함에 분노한다.
그런데 사랑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랑도 감정의 하나이고 관계와 감정의 다양한 문제들은 앞서 사랑처럼 중요하지만 어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들을 낳는다. 주위 사람과 유대감을 가지고 즐겁게 지낼 수 있는 것, 호기심과 흥미를 가지고 치열하게 파고들 수 있는 것, 분노가 관계를 파괴하지 않을 수 있게 조절하고 표현할 수 있는 것, 지나친 죄책감에 혹은 공감의 부족으로 스스로 소외되지 않는 것 등등 관계 속에서 다양한 감정은 사랑만큼 우리 삶에서 참 중요하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깊은 절망으로 자신을 몰아넣는 사람은 다르게 생각할 수 있음과 다르게 느낄 수 있음을 알기가 어렵다. 사람들 앞에서 너무나 수줍은 자신의 모습이 창피하고 바꾸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자신감이 바닥을 친 자기 자신을 혹은 낙담한 친구를, 삐쳐 있는 애인을 어떻게 위로할지 잘 모른다. 나름의 방법으로 순간순간을 대처하지만 감정적 순간에 참여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고 자신의 방법이 괜찮은 것인지 아니지도 잘 모른다.
때로 감정이 제대로 이해되고 다루어지지 못할 때 우리는 우울의 늪에 빠지기도 하고 갈등을 겪으며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되기도 한다. 대학입시를 위해 그리도 치열하게 배우고 외우던 수많은 지식 중 무엇이 지금의 삶에서 기억되고 사용되는가. 그에 비해 사랑을, 호기심을, 분노를, 죄책감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를 어디에서 배울 수 있었던가.
어린 시절 누군가와 치고 박는 일 없이 자란 나는 청년기 내내 감정이라는 것이 참 어려웠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도 어려웠고,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눈빛을 보내도 알아채지 못했다. 조금만 잘못해도 큰일 난 줄 알았고, 내면에 몰아치는 질책은 스스로를 주눅 들게 했다. 몹시도 수줍었으나 그렇지 않은 척 애도 많이 썼다. 그런 애씀이 사람들과 거리를 만들기도 했다. 화를 낼 줄 몰랐고 때로는 화가 난 줄도 몰랐다. 무엇을 잘해도 그다지 신나지 않았다. 왠지 모를 슬픔을 품고 있었지만 마음속을 따뜻하게 들여다볼 줄 몰랐고 남들에게 위로를 청할 줄도 몰랐다. 웃는 것과 미안한 것 외에 감정을 드러내면 마치 옷이라도 벗기어진 듯 당황스러웠다. 당연히 다른 사람의 감정적 반응은 스트레스가 됐고 그리 잘 응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 최근 애니메이션 영화 「겨울왕국」이 어른들까지 사로잡은 것은 아마도 이런 사람이 나만은 아니어서일 것이다.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해, 혹은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자신만의 성 안에 스스로를 꼭꼭 가두며 사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래서 심리학을 공부했는지 모르겠다. 난 정말 몰라서 공부를 했다는 말을 가끔 한다. 나처럼 모르는 사람이 전공생이 되고 박사님이 돼도 되나 고민도 했다. 그렇지만 세상사가 정말 학습과 변화의 과정이다. 이론을 배우고 사람들을 만나며 훈련을 하니 조금씩 알 것 같다. 기술을 익히기 위한 끊임없는 관심과 오랜 시간의 인내, 직업이 되다보다 이게 가능했던 것 같기도 하다. 또 다양한 관계들은 때론 벅찬 기쁨으로 때론 혹독한 아픔으로 다가오지만 이를 바꾸거나 피하려 하지 않게 되니 감정이 어떻게 생겨나고 완성되는지 그림이 그려진다. 감정적 삶에 편안하게 머물 수 있게 된다. 사랑도 감정도 기술이다. 나처럼 책상머리에게 배우지 않아도 그 가치를 알고 인내를 가지고 배우려 하면 더 나아질 수 있는 거였다. 어떤 감정이든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지만 조절하는 능력도 필요하고 또 상대를 지나치게 거스르지 않게 잘 표현하는 방법도 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시행착오를 허용하지 않으면 배우는 것은 어렵기 마련이다.
얼마 전 오빠네 집에 놀러갔다. 큰 아이가 뭐라고 하자 억울한 둘째 아이는 씰룩거리며 왔다갔다 격앙돼 투닥투닥 할 말을 하고 나더니 금세 둘이 붙어 좋단다. 믿음과 애정만 있다면 감정은 계절의 바뀜과 같이 자연스럽다. 책상머리에서 힘겹게 배우지 않아도 감정의 기술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쌓이고 숙성돼 간다. 있는 그대로를 드러낼 수 있으면 감정은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잘 탄 장작의 재처럼 사라진다. 분노는 때로는 미안함으로 때로는 투지로, 자연스럽게 변화한다. 그렇지만 표현되고 받아들여지지 못한 감정은 유통기한이 지나도 썩지 않는 덩어리로 남아, 현재의 경험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쌓인 게 많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에 화가 나는 것처럼. 슬픔이 우울이 되는 것처럼.
감정을 드러내려면 사람이 필요하다. 내 감정을 비난 없이 보아줄 것이라는 신뢰가 필요하다. 감정의 교류 속에서 유대와 믿음이 쌓이고 이 믿음의 기반 위에 감정의 교류가 이뤄지고 감정적 능력은 성숙하게 된다. 견고한 믿음은 얼마나 많은 반복 속에서 쌓이는 것인가. 그렇지만,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걷거나 말을 한 것은 아니다. 지금 너무 당연해보이고 새로 배우자면 끝이 없어 보이는 걷기나 말하기도 유능하게 되기까지 얼마나 반복했는지 떠올려 보자. 몸을 뒤집는 것부터 허리를 세우는 그리고 걸음을 떼는 그 과정 과정을 그야말로 힘든지도 모르고 익혀오지 않았던가. 벙어리 같던 아이가 입을 떼는 순간 어른들은 환호한다. 입을 떼기까지 아이는 수없이 보고 들으면 기술을 익혔을 것이다. 지금 당연한 걷기와 말하기, 사실 쉽지 않게 배웠다는 것을 떠올리면 감정의 기술, 이것이 그리 더 어렵다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최해연 한국상담대학원대학·성격심리
필자는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인지 및 심리과학 사업단에서 포스트닥을 했으며, 「한국인에게는 억압이 적응적이던가?: 억압 측정의 타당성 논의」 등의 논문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