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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위한 준비는 새로운 정치시스템의 확보에서부터_녹색평론 (교수신문_2011 11 14)
작성자 이규호 작성일 11-11-30 17:57 조회 6,375
“미래를 위한 준비는 새로운 정치시스템의 확보에서부터”  
 
- 20주년 맞은 <녹색평론>이 던지는 목소리 -  
 
<녹색평론>이 20주년을 맞았다. 이들은 지난 20년 동안 생태적·사회적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립적 순환 경제에 기반한 삶의 재건을 내세우며, 생태와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은 <녹색평론> 2011년 11-12월호에 ‘좋은 사회는 어떻게 가능할까’를 게재, 앞으로의 방향성을 시사했다. 그의 글 일부를 발췌했다.
 
이 사회에서 현재 우리가 흔히 보고 듣는 ‘진보적’사상과‘개혁적’담론은 거의 예외 없이 근시안적 현실 진단과 피상적인 처방에 머물러 있다. 이 불모적인 현상의 원인은 무엇일까. 아마도 최대 원인은 그러한 사상·담론속에 에콜로지에 대한 이해가 현저히 결여돼 있다는 점일 것이다.

문제는 그 ‘경제문제’가 이제는 ‘에콜로지’를 고려하지 않고는 한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는 국면에 지금 우리 모두가 처해있다는 점이다. 일찍이 독일 시인 브레히트는 편협한 근시안적인 이해관계에 사로잡혀 전쟁과 학살로 치닫고 있던 자기 시대의 상황을 “자신이 앉아있는 나뭇가지를 톱으로 베고 있는” 어리석은 인간의 행위로 묘사한 바 있다. 이것은 브레히트 시대보다도 오히려 오늘의 상황을 더 적실하게 드러내는 예리한 비유라고 할 수 있다.
 
순환적인 삶의 패턴이 필요한 이유

지금 필요한 것은, 이미 늦었는지 모르지만 이제라도‘경제’에 관한 정의를 다시 내리고, 그것이 사회 전체의 새로운 상식이 되도록 하는 노력이다. 그동안 ‘경제’라고 하는 것은, 지난 200~300년간 화석연료·핵에너지에 기반한 무한한 욕망 추구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온 개념체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착오적인‘경제’개념을 척결하지 않는 한, 최소한도의 기초적 생존·생활도 불가능해지는 날이 곧 다가올게 분명하다.

시급한 것은 경제성장, 생산력 증대, 대량생산/대량소비를 통한 ‘발전’ 혹은 ‘진보’의 추구라는 낡은 공식을 과감하게 버리고, 우리의 생활 방식을 자연의 본성과 리듬에 순응하는 순환적인 패턴으로 전환하는 일이다. 요컨대 산업자본주의 이전, 인류의 오랜 생활방식이었던 순환경제 시스템의 복구·재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순환경제란 단순히 적게 생산하고, 적게 소비하는 생활패턴을 뜻하는 게 아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위기는 개개인이 물자를 절약하는 미덕을 발휘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무리 절약하더라도 재생 불가능한 자원은 언젠가는 고갈되기 마련이고, 오염된 환경은 결국 거주 불가능한 공간으로 변해버릴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재생 불가능한 자원인 지하자원-원자력을 포함한-에 의존하지 않고, 영구적 지속이 가능한 태양에너지 중심의 지상자원에 의존하는 생활패턴의 선택이다.

문제는 이러한 선택이 가능하냐 하는 것이다. 이 선택은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경제’의 영역을 넘어서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순환적 생활패턴을 선택한다는 것은 단순히 물자와 에너지 조달방식의 변화가 아니라, 삶의 총체적 방식에 있어서의 근본적 변화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결국 정치적 선택과 결정이 필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용문제만 해도 그렇다. 좁은 의미의 경제문제로만 볼 때, 부당해고, 실업, 비정규직 등‘일자리’문제는 자본과 노동 간의 문제로 환원되기 쉽다. 그리고 그 차원에 머물러 있는 이상, 고용문제의 해결은 난망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글로벌경제시스템 속에서 기업은 단지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이윤 증대를 위해서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는다. 기업 쪽에서 볼 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소비자의 존재이지 더 많은 노동자의 존재는 분명 아니다. 이미 시장은 과잉 생산물로 넘쳐나고, 자동화·기계화의 급속한 발달로 생산현장에서의 인간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세계에는 아직도 초저임금 노동력을 제공하고, 기업의 방종한 행태를 묵인하거나 조장하는 곳이 허다히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애국심 따위에 호소하는 것으로써 기업의 해외 이전을 막아낼 도리는 없는 것이다. 이 상황은 계속 확대·심화될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고용문제의 전망은 실로 암담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970년대 전태일의 시대에 노동자는 ‘착취’를 당했으나, 지금 김진숙의 시대에 노동자들이 경험하는 것은 노동으로부터의‘배제’이다. 한때 이 나라 서민층 아이들의 꿈은 대통령, 판사, 과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정규직’이 아이들(그리고 부모들)의 꿈이 됐다.
 
새로운 사회의 실현을 방해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 더 많은 성장을 통해서 극복한다는 방법은 이미 효력을 상실했다. ‘복지국가’ 시스템을 통한 극복이라는 것도, 그것이 불가피하게 더 많은 성장을 전제로 하는 시스템인 이상, 역시 지속 불가능한 방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방법이 없진 않다. 지금까지 산업사회의 주류였던 방법, 즉 대규모 산업시스템 속에서 일자리와 생계를 구하는 것을 그만두고, 소규모 지역 중심, 자립적 생산·생활협동체들을 광범하게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틀 속에서 태양에너지에 기반을 둔 순환경제를 구축하면 된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게 아니다. 문제는 이것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적 실천과 확산을 가로막는 기득권 세력의 방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민주주의의 확립, 즉 보편적 이성이 존중을 받고 합리적 상식이 통할 수 있는 정치시스템을 확보하는 게 관건인 것이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2011년 1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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